
세덕사(世德祠) 전경


晋陽河公 諱拱辰은 고려 현․종조에 門下侍郎으로서 忠臣으로 순절하신 後에 國家에서는 公의 忠節을 追尊하야 尙書工部侍郎同平章事의 높은 벼슬을 贈職하였다.
顯宗2년 辛亥(西紀1011년)에 契丹은 十萬大兵으로 首都開成을 侵犯하여 분탕을 하니 顯宗은 廣州로 피했다가 다시 南으로 羅州까지 쫓기게 되었다.
이때 河公은 顯宗의 親書를 받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契丹으로 가서 天賦의 叡智와 豪謄으로 을 달래서 할 것을 請했다.
契丹王은 河公의 풍채와 言辯에 感動하여 撤軍할 것을 허락하고 河公을 人質로 하여 契丹에 留하게 하니 多幸으로 因하여 顯宗은 무사하게 開成으로 돌아왔다.
契丹王은 公을 총애하여 優待했으나 公은 故國으로 돌아갈 마음이 간절했다. 가만히 千里馬를 東國으로 가는 路邊에 配置해 두었다.
그러나 일이 탈로 나서 契丹王은 크게 怒하여 公을 鞠問하니 公은 顔色도 변하지 않고 늠름하게 대답했다.
“나는 高麗의 臣下다. 죽을지언정 너의 나라의 臣下는 될수없다.”
하고 斷乎하게 대답했다.
契丹王은 義롭게 생각해서 다시 諭書를 내려 契丹의 臣下가 되라하니 公은 호통을 쳐 契丹王을 꾸짖었다.
슬프다 드디어 公은 害를 當하니 顯宗2년 辛亥(西紀 1011년) 12월 己酉日 이었다.
文宗6년 壬辰(西紀1052년) 국가에서는 公의 忠節을 襃彰하여 上書工部侍郎同平章事의 벼슬을 追贈하고 肖像을 麒鱗閣上에 그려 걸었다.
이분의 事蹟은 高麗列傳에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公의 神位를 모신 祠堂이 啓源祠다. 趾美祠에는 제1위에 諱湜을 모시었으니 贈純忠補助功臣 輔國崇祿大夫判司評府事晋康君行膳官署丞公의 神位요 제2위에는 諱巨源이시니 贈純忠翊祚功臣 資憲大夫兵曹判司行中正大夫典客令公의 神位요 제3위 諱乙淑이시니 翰林學士精勇郎將備巡衛公의 神位다.
昭繩祠의 제1위는 諱濂이시니 精資斯員神虎衛公의 神位요 제2위는 諱淳敬이시니 世宗26년 甲子(西紀1444년) 文科에 登第하여 世祖朝에 左翼願從功臣行成均直講公의 神位다.
啓源趾美昭繩三司의 先祖를 追慕하면서 子孫萬代에 전하기 위하여 尙書工部侍郎公後孫 京完은 世德士를 建立하고 삼가 廟庭碑를 받들어세운다.
1976년 월 일 密城 朴鍾和 撰